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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 멀리 더 높이 더 깊이
    카테고리 없음 2022. 4. 22. 13:42
    아른거리는 아지랑이
    폴폴 날아다니는 티끌들
    온갖 살아가는 것들이
    들이쉬고 내쉬며 생기는 것이지

    저 아득한 하늘은 푸르고 푸른데
    그건 정말 제 본디 빛깔일까?

    그저 멀고 아득하여
    그렇게 보이는 걸까? 

    저 높은 데서 아래를 내려다보아도
    그렇게 보일 테지.
    野馬也 塵埃也 
    生物之以息相吹也
    天之蒼蒼 其正色邪 
    其遠而無所至極邪
    其視下也亦若是則已矣

     

    대 과학은 여러 척도를 발명해 냈다. 덕분에 고대인과 달리 우리는 모든 것을 잴 수 있다. 그것도 매우 정확하게. 길이와 무게, 부피까지. 그것뿐인가 실상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소립자보다 작은 것의 크기도 재며, 우리 은하보다 더 큰 우주를 재기도 한다. '헤아릴 수 없음'은 근대인과 어울리지 않는다. '숫자'로 표기되지 않는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무한無限이란 없다. 무한 조차도 뚝딱 계산해버리니 말이다. 설사 있다 한들, 아직 계산해내지 못한 것에 불과하다. 아직 답을 내지 못했을 뿐, 언젠가는 답을 찾아낼 것이다. 이런 근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고대인의 상투적인 표현은 어리석기 그지없다. 고대인은 고작 숫자 3을 충분한 숫자라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공자도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그 가운데 스승이 있다고 말했다. 셋이란 하나, 둘, 셋의 셋이 아니라 충분하다, 혹은 많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삼척동자란 충분히 자란 아이라는 뜻이며, 삼천리란 까마득한 거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까마득함. '리里'가 어느 정도인지 상관없이 전통사회에서 삼천리는 경험할 수 없는 거리였을 테다. 태반의 사람은 삼천리는커녕 수백리도 못 가보았을 것이다. 십리도 못 가고 발병 나기는커녕 십리를 벗어나 먼 길을 떠날 일이 얼마나 있었을까. 

     

    헌데 <장자>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성 밖 들판으로 나갔다 돌아온다면 세끼 식량으로 만도 충분하다. 그러나 백리 길을 가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밤을 새워 곡식을 찧어가며 식량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천리 길을 가려면? <장자>는 말한다. 석 달간 양식을 모아야 할 것이라고. 

     

    말이 석 달이지, 석 달간 양식을 모은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단순히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석 달간 모아둘 수 있는 양식이 어디 있단 말인가. 태반은 썩어 버릴 것이고, 태반은 상할 것이다. 석 달 양식을 다 모았다 한들 그것을 지고 가는 것도 일이다. 아뿔싸! 양식을 모으느라 석 달이 지나자 계절마저 바뀌고 말았다. 

     

    천리 길을 간다며 석 달간 양식을 모으는 자를 보면 옛사람은 무어라 생각했을까. 터무니없이 쓸데없는 짓을 한다 혀를 끌끌 찼을 것이다. 바로 장자가 그런 인물이다. 그의 친구 혜시는 그를 보며 늘 걱정이 많았다. 영 쓸모없는 일에 힘을 기울이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장자는 터무니없는 일을 벌이기 좋아하는 인물이다. 그의 독특함을 이해하려면 근대인의 도구를 버리고, 혜시의 시선에서 벗어나 장자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게 쉽지 않다. 장자가 말하는 헤아릴 수 없음을 상상하기에 앞서 너무도 쉽게 척도를 들이대기 때문이다. 우리는 숫자에 갇힌 인간이다. 

     

    예를 들어 <장자>가 첫머리에서 '북쪽 깊은 바다'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쉬이 북방의 차가운 해변을 상상해버린다. 그러나 고대 중국인들에게 '북쪽 바다'란 얼마나 막막한 곳이었을까? 그들은 네모난 땅 한가운데 살고 있다 생각했다. 이들에게 바다란 세계가 끝나는 이편 너머 아득한 저편을 한데 아우르는 말이었다. 그저 아득하고 먼 곳이다.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에 상관없이. '가도 가도 끝없는 넓은 땅'이라는 상투적인 말처럼. 바다, 특히 북쪽 바다란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거기에 커다란 물고기가 있단다. 지구 상 가장 커다란 포유류 고래를 상상하지는 말자. 깊이를 알 수 없는 까마득한 심해에 사는 헤아릴 수 없는 크기의 무엇이다. 물속에 사니 물고기라고 생각하나 그 정체는 알 수 없다. '알 수 없음[不知]', 장자가 그의 글을 열며 이 표현을 거듭해서 말한 이유를 헤아릴 필요가 있다. 물고기라는 것은 그저 하나의 우화에 불과하다. 실상 중요한 것은 뭔가가 있다는 점이다. 헤아릴 수 없는 뭔가가.

     

    장자는 이 녀석을 저 깊은 심해에서 꺼내어 하늘 높이 던져 올린다. 바다를 출렁이며 솟구쳐 날아오른다. 구만리 창천으로! 구름처럼 보이는 저것, 커다란 새도 크기를 잴 수 없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든, 어떤 척도이든  소용없다. 압도적인 크기와 높이는 그저 넋을 잃고 바라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 새는 이 땅을 가로질러 날아간다. 아득한 북쪽에서 아득한 남쪽, 하늘 못[天池]으로!

     

    북명北溟에서 천지天池까지, 북쪽과 남쪽을 가로지르는 것은 물론 컴컴한 심해에서 까마득한 하늘까지! 이렇게 장자는 커다란 공간을 스케치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압도적인 넓이와 앞도적인 깊이와 높이! 대관절 이런 이야기를 첫머리에서 꺼내놓는 이유는 무엇인가? 

     

    뱁새와 매미의 비유는 정확히 장자를 손가락질하는 자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대관절 그렇게 까마득한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느냐고. 설사 그런 세계가 가능하다한들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나무 저 나무를 오가며 살아가기에도 바쁜 삶인데. 

     

    장자의 말은 매몰차다. 자잘한 앎은 커다란 앎을 알 수 없으며, 자잘한 삶도 커다란 삶을 알 수 없다. 결국 뱁새와 매미는 결코 장자와 화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장자의 말처럼 어찌 매미가 봄과 가을을 알 수 있을까. 뱁새와 매미에게 장자의 말은 결코 닿을 수 없는 의미 없는 말의 뭉텅이에 불과할 것이다.

     

    실마리를 찾자. 다행인 것은 장자가 '존재'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장자의 우화는 중요한 질문을 담고 있다. 푸르고 푸른 하늘은 본디 빛깔일까?[天之蒼蒼 其正色邪] 이럴 땐 근대 과학의 지식이 도움이 된다. 하늘은 본디 색깔을 가지고 있지 않다. 빛이 산란되어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아무리 하늘 높이 올라가도 하늘색을 볼 수는 없을 것을 장자는 알고 있었다. 

     

    장자는 세계 바깥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세계는 늘 우리의 인식보다 더 크다. 따라서 세계의 본모습을 아는 날은 결코 이르지 않을 것이다. 세계는 늘 막막함으로 우리에게 육박해 온다. 그러나 그렇게 보일 뿐이라는 사실은 거꾸로 흥미로운 질문을 만들어낸다. 다르게 볼 수 있는 건 아닐까? 저 높은 데서 아래를 내려다보아도 영 다르게 보일 테지. 

     

    우리가 발을 디딘 땅은 아지랑이가 아른거리며 티끌과 먼지가 폴폴 날아다니는 곳이다. 이런저런 존재들이 뒤섞여 사는 삶의 현장. 장자는 여기서 저 까마득한 하늘, 컴컴한 심해를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나 그 거꾸로도 가능하다 말한다. 높은 하늘에서 보는 세계는, 깊은 심해에서 바라보는 세계는 결코 같지 않을 것이다. 중심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중심을 바라본다면. 그렇게 보면 중심은 어느새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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