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낭만적 독해를 경계하며
    카테고리 없음 2022. 4. 22. 12:36

    <장자>에 늘 따라붙는 말이 있다. '자유'. 연암서가에서 출간된 김학주의 번역본에는 '절대적인 자유를 꿈꾸다'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안병주의 번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소요유>에 붙인 해설 일부를 인용한다.

    상식을 뛰어 넘은 무한의 시간과 무한의 공간으로 날아가는 붕새를 통해, 통쾌한 해학의 철학자 장주는 그가 주장하는 절대자유의 경지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물론 여기 등장하는 곤이나 붕도 결국 변화되는 만물의 하나이고 만물이 모두 평등하다는 만물제동의 물 가운데의 하나임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상식을 초월한 곤과 붕을 통해 일단은 절대 자유의 경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소요유는 곧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이라는 뜻이다.
    - 안병주역, 전통문화연구회. 25쪽.

    구속이 없는 절대의 자유로운 경지에서 노니는 것을<소요유>라고 한다. 현실 세계에는 여러 가지 구별(또는 차별)이 있어 사람을 구속한다. 권력과 신분, 도덕과 권위, 삶과 죽음, 가난과 부유 등…. 장자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이욕利慾에 눈이 어두워 날뛰는 인간의 희노애락을 비웃으며 도道의 세계, 초월적인 자유로운 경지에 노닐 때 사람은 비로소 참된 행복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그<소요유>의 즐거움을, 무한한 허공을 힘차게 날아올라가 미지未知의 북해北海로 날아가는 대붕大鵬에 비유한다.
    - 안동림역, 현암사. 25쪽.

     

    평등 – 만물제동은 <제물론>의 주요 주제로 이야기된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자.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소요유>는 자유를 노래하는 글로 이야기된다. 그것도 절대 자유! 이런 해석은 세속을 초탈한 도인을 떠올리게 한다. 이때의 도인이란 밥 짓고 청소하며, 구차한 일상을 살아가는 그러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인위人爲로 일컬어지는 세속의 일들을 훌훌 털어버린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러한 독해가 과연 타당한 것인지, 의미있는 것인지를 묻고 싶다. 장자, <장자>라는 텍스트와 긴밀하게 연관된 역사적 인물 장자는 과연 그렇게 초탈한 사람이었을까? 그는 순수한 정신의 자유를 꿈꾼 인물이었을까? 또한 그런 삶을 읽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 낼까? 절대 자유라는 고원한 이상은 이 질척이는 현실에서 벗어날 힘을 선물해줄 수 있을까?

     

    장자가 말한 것이 절대적인 자유라면, 그것은 어떤 삶을 가리키는가? 구체적인 실천은 어떻게 가능한가? 과연 여기에 무엇을 답할 수 있는가? 나는 '절대적 자유'를 이야기하는 이들이 과연 어떤 삶을 주장하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삶에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해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인식적 환기, 속이 거북할 때마다 들이키는 탄산수마냥 일종의 청량제 역할에 머무는 것은 아닌가 묻고 싶다. 춘추전국은 전란의 시대였고 유래 없는 혼란기였다. 이 혼돈 가운데 저마다 삶의 길을 모색한 것이 제자백가 아니던가. 백가쟁명이라 불리는 치열한 싸움터에서 장자만 홀로 고고한 인물로 세상사를 관조했다는 것이 과연 옳은 해석인지 묻고 싶다. 인간 장자. 그는 과연 어떤 삶을 지향했는가. 그가 발 디딘 현실 위에서 그 삶은 어떻게 가능한 것이었나. 이것을 묻고 싶다.

     

    한편 이런 질문은 거꾸로 내 자신에게 던지는 것이기도 하다.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서 <장자>를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유를 꿈꾸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 자유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절대적 자유란 그냥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것에 불과하지 않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절대적인 자유가 만들어내는 주체란, 무능력한 주체에 불과하지 않나? 그 문제를 만들어내는 체제와 싸우기는커녕 손에 무기 들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나에게 절대적 자유란 '네 현실을 받아들이고 가만히 잊어라'라는 말 이상으로 들리지 않는다.

     

    전복적 시각에서 <장자>를 읽어내는 길은 없는 것일까? 장자의 말은 무기가 될 수 없는 건가? 그의 말은 예리한 칼이 되어 또 다른 삶의 문을 여는 키가 될 수는 없나? 그가 열어젖혀 보이고자 했던 삶은 무엇이었을까. 그도 이 땅을 살았던 한 명의 가련한 사람이었을 진데, 과연 그가 당면한 삶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욕망, 그의 고민, 그의 투쟁을 만날 수 없는 것일까?

     

    '절대적 자유'라는 실체없는 말에서 벗어나 장자를 읽어보려 한다.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읽는 게 아니라 장자의 말이 무엇에, 누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물어보며 읽으려 한다. 모두를 위한 말은 없다. 목적과 대상을 명확히 할 때, 언어는 삶을 움직이는 지렛대가 된다. 

     

    이를 위해<소요유>라는 제목을 괄호 치고 읽으려 한다. '소요유'는 자유롭고 여유로운 삶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레게는 이를 'Enjoyment in Untroubled Ease'로 옮겼다. 한편 제인 잉글리시는 'Happy Wandering'으로, 로버트 앨린슨은 'The Transcendental Happiness Walk'로 옮겼다. 일반적인 이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깐깐하게 접근하면 <소요유逍遙遊>에서 '소요유逍遙遊' 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끝없는 세계에 노닐다[이유무궁以遊無窮]"와 "느긋하니 그 아래서 잠자다[소요호침와기하逍遙乎寢臥其下]"에서 각각 '유遊'와 '소요逍遙'를 뽑아 합쳐 만든 말이다. 그러나 <장자 : 외/잡편>의 경우 각 편을 시작하는 말에서 임의의 단어를 뽑아 편명으로 삼았다. 고대 텍스트의 편명을 정한 방식도 이와 비슷하다. <장자 : 내편>의 제목은 후대의 편집자가 임의로 정해 붙인 것에 불과하다는 말씀. 따라서 제목을 괄호 치고 읽자는 것은 <장자>에 대한 기존의 인상을 접어두고 읽자는 뜻이며, <장자> 편집자의 관점에서 벗어나 읽어보자는 뜻이기도 하다. 

     

    <장자: 내편>의 제목이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우리가 본문의 내용을 살펴본 이후에 제목을 붙인다고 할 때엔 좀 다른 제목을 붙일 수도 있을 테다. "떠나자! 세상 밖으로"는 그 예 가운데 하나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