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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장주와 <장자>카테고리 없음 2022. 4. 15. 16:34
<사기열전>에 실린 기록 전문을 아래에 옮긴다. 상세한 독해를 위해 원문과 번역문 사이에 설명을 덧붙였다.
장자는 몽蒙 지역 사람으로 이름은 주周이다. 장주는 한때 몽 지역의 옻나무 동산의 관리였다. 양혜왕, 제선왕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
莊子者,蒙人也,名周。周嘗為蒙漆園吏,與梁惠王、齊宣王同時。장자에 대한 객관적 기록이다. 장자莊子의 ‘자子’는 훌륭한 사상가에 붙이는 존칭이다. 그의 이름은 장주莊周, 몽蒙 출신이라고 하는데, 그곳이 어디인지는 확실치 않다. 전국시대 송宋나라 출신으로 추정된다. 펑유란은 그가 송나라 사람이기는 하되 초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송나라는 당시 강대국 틈에서 자주 침략을 당하다 결국엔 멸망하고 만다. 망국의 후예로서 장자는 좀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에게 자휴子休라는 자字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사기>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이다. 아마 후대에 첨가된 내용이 아닐지.
장자는 칠원漆園의 관리였다. 옻나무를 생산하는 동산지기, 혹은 옻칠을 한 제기祭器를 관리하는 곳이 아니었을까. 그래서인지 <장자>에는 나무의 비유가 여럿 등장한다. 한편 장자도 관리 생활을 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다른 제자백가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사士 계층의 인물이었다. 이러한 장자의 출신은 그를 은둔자로만 보는 관점에 의문을 던지게 한다. 그에게도 억척스레 일하며 살아가던 시절이 있었다.
양혜왕, 제선왕과 동시대라는 말은 이 둘을 만났던 맹자와 같은 시대 인물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맹자는 장자에 대해, 장자는 맹자에 대해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동시대를 살았으나 서로 아무런 접점이 없었던 것일까? 여러 의문이 들지만 이 역시 명확히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속칭 노는 물이 달랐다고 하자. 맹자는 임금들을 만나 국정을 이야기하던 인물이었으나 장자는 궐 밖, 어쩌면 성 바깥 황량한 곳에서 방황하던 사람이었다.
양혜왕, 제선왕과 동시대라는 기록을 근거로 기원전 4세기 중반에 활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주周나라의 통치 체제가 거의 무너진 상황이었다. 얼마 전까지 공公이라 불리던 제후들이 왕王을 자청하고 나섰다. 이제는 천자의 나라, 주周를 공공연히 무시하는 것을 넘어 은근히 천자의 자리를 넘보는 이들도 있었다. 이를 위해 제후들은 저마다 부국강병富國强兵에 몰두했다. 주나라의 낡은 체제는 무너졌으며 천하는 참혹한 전란의 시대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그의 학문은 두루 여러 방면을 다루었으나 핵심은 노자의 가르침을 따른다. 그러므로 십여 만 자의 글을 남겼는데 대체로 우화이다.
其學無所不闚,然其要本歸於老子之言。故其著書十餘萬言,大抵率寓言也。학문을 두루 익혔다는데 이때의 '학문'이 과연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두루 다방면의 지식을 쌓았다는 뜻이 아닐까? 사마천은 노자와의 연관성을 이야기한다. 그는 장자가 노자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다고 본다. 그러나 노자는 신화적 인물로 실존 여부보다 허구적인 기록이 많다. <노자>와 <장자>의 내용은 상이하다는 점을 짚어둔다.
<장자> 텍스트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기록이다. 십만여 자의 글이라는 점, 대부분이 우언寓言-우화라는 점. 우화는 <장자>의 중요한 특징이다. <장자>는 대부분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일부 복잡한 철학적 서술을 제외하면 짤막한 우화를 묶어놓은 책이 <장자>이다. 장자는 우화, 다르게 말하면 ‘이야기’라는 형식을 통해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장자는 가르치거나 선언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이야기를 들려주고 보여줄 뿐이다.
흔히 철학을 고차원적인 사고 연습이라 생각한다. 논리적인 사고의 추론, 개념과 개념을 잇는 사유 실험. 하여 늘 철학은 어렵다. 그러나 우화-이야기란 어떤가? 철학은 이해를 강요하나 이야기는 감상이 필요하다. <장자>가 우화로 이루어진 만큼 우리는 여느 철학책과는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그렇다고 쉬이 교훈을 찾는 길로 빠지지 말자. 교훈이란 우리가 따라야 하는 일상적 윤리규범을 재확인하는데 불과하다. 거꾸로 장자의 우화는 기존의 상식을 깨뜨리는 힘을 지니고 있다. 장자의 우화는 교훈으로 돌아갈 수 없는 당혹스럽고 낯선 길로 우리를 이끈다.
<어부漁父>, <도척盜跖>, <거협胠篋>편을 지어 공자의 무리를 비판하고 노자의 학술을 주장했다. <외루허畏累虛>, <항상자亢桑子> 따위는 모두 사실과 무관한 헛소리이다. 그는 글과 이야기를 지어 세상일을 논하는 것을 잘하였다. 이를 가지고 유가와 묵가를 공격하였다. 당시 빼어난 학자라 하더라도 그의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터무니없고 제멋대로여서 제후나 대부에게 등용될 수 없었다.
作漁父。盜跖。胠篋。以詆訿孔子之徒。以明老子之術。畏累虛。亢桑子之屬。皆空語無事實。然善屬書離辭,指事類情,用剽剝儒、墨,雖當世宿學不能自解免也。其言洸洋自恣以適己,故自王公大人不能器之。<어부>, <도척>, <거협>은 모두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외루허>, <항상자>는 전해지지 않는다. 앞서 사마천은 <장자>가 십만여 자라 했는데, 현재 우리가 읽는 <장자>는 이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약 6만 4천 여자로, 사마천이 이야기한 것에서 1/3 가량이 사라졌다.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도 알 수 없다. 따라서 사마천이 무엇을 보고 사실과 무관한 헛소리라고 평가했는지 역시 의문이다. 그러나 전반적인 <장자>의 기술 방식을 보았을 때, ‘사실과 무관한 헛소리[空語無事實]’라는 평가는 나름 적확한 표현이기도 하다.
사마천은 장자가 공자의 무리를 공격했다고 이야기한다. 장자는 유가를 어떻게 보았는가에 대해서는 서로 주장이 엇갈린다. 공자의 형식적인 학문을 비판했다는 관점도 있으나 그와 달리 공자와 장자의 연속성에 주목하는 관점도 있다. 사마천은 유가와 도가의 대립이라는 도식으로 장자를 공자의 대척점에 놓고 있는 듯하다. 그 연장선에서 공자를 논박하며 노자의 가르침을 드러냈다고 평가한다. 사마천의 관점이 실린 부분은 괄호쳐 놓도록 하자. 다만 앞으로 다룰 <내편>에서는 공자와 그의 제자 몇이 꽤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언급해둔다.
마찬가지로 장자가 유가와 묵가를 공격했다는 사마천의 서술도 조심스럽게 읽고자 한다. 장자는 분명 논쟁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우화를 통해 누군가를 특정한 관점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과연 그 대상이 유가와 묵가였을까. 그보다는 명가名家나 법가法家에 비판의 칼날을 들이밀었다고 보는 게 옳다. 장자는 명징한 세계, 이쪽과 저쪽을 선명하게 가르는 이들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을 선명하게 묘사하는 이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내편>을 읽어가며 그의 특징을 천천히 알아보도록 하자.
춘추전국은 전란戰亂의 시대였으며 또한 유세객遊說客의 시대이기도 했다. 지식인 계층[士]은 저마다 자신의 학설을 가지고 다투었다. 궁정이 학설을 다투는 전장이 되었다. 이들은 임금을 만나 자신의 학설을 설파했으며, 이를 통해 등용되어 천하를 경영하기를 바랐다. 한편 임금들은 부국강병으로 이끌 인재를 찾고자 힘썼다. 그러나 장자는 이에 빗겨나있다. 그의 시선은 궁정으로 향하지 않는다. 그는 구중궁궐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더불어 욕망이 넘실거리는 성곽 안의 저잣거리도 그의 자리는 아니었다. 그는 성곽을 벗어나 드넓은 들판, 광야廣野에 선 철학자였다. 임금이 이런 장자에 관심을 둘 리 없었다. 권력자들에게 장자는 영 쓸모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종종 그를 찾는 이도 있었다.
흔히 장자에게서 자유를 발견하곤 한다. 그러나 텅 빈 공간에서 자유가 시작하지 않는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그는 당대의 욕망, 권력과 명예로부터 자유로운 인물이었으며 나아가 왕공대인王公大人으로 상징되는 사회적 위계질서로부터 자유로운 인물이었다. 아니, 벗어나고자 한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종종 자유란 아무 얽매임 없는 상태를 이야기하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얽매임이 없다면 갈등이 없을 것이고, 이에 대해 논의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무엇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그만큼 절실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장자도 당시의 역사적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춘추전국이라는 역사적 현실에서 그를 읽어야 그의 저항, 그가 시도한 철학적 실험의 방향과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 역시 한 시대를 살아낸 인간이었다는 점을 잊지 말자. 사마천은 언급하지 않으나 장자는 인생人生이라는 곤혹스런 삶의 바탕에도 주목했다. 인간은 모두 삶에 내던져졌으며 그러하기에 이 삶을 살아내야 하는 존재이다. 장자의 질문은 누구에게나 절실하고 막막하다.
초위왕이 장주가 빼어난 인물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사신과 많은 재물을 보내 그를 재상으로 삼으려 했다. 장주가 웃으며 초나라 사신에게 말했다. "귀한 재물을 가져왔고, 높은 재상 자리를 제안하는 구려. 헌데 교제郊祭에 바치는 희생 소를 보지 못했소? 여러 해 동안 잘 먹이고, 비단옷을 입혀서 태묘로 끌고 갑니다. 그때 혼자 나뒹구는 돼지를 바란들 어찌 그럴 수 있겠소? 나를 더럽히지 말고 썩 꺼지시오. 나는 이 지저분한 곳에서 멋대로 즐기며 살지언정, 나라를 가진 자에게 끌려다니지 않겠소.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고자 하오."
楚威王聞莊周賢。使使厚幣迎之。許以為相。莊周笑謂楚使者曰。千金重利。卿相尊位也。子獨不見郊祭之犧牛乎。養食之數歲。衣以文繡。以入大廟。當是之時。雖欲為孤豚。豈可得乎。子亟去。無污我。我寧游戲污瀆之中自快。無為有國者所羈。終身不仕。以快吾志焉。초위왕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고사. <장자> 본문에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을 만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관직에 나가는 것을 죽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관직에 오르는 것은 제단에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것과 같다. 똑같은 것을 다르게 보는 법이다. 누구는 제의의 신성함에 주목할 테지만, 장자는 도구화되는 생명을 본다. 장자는 무엇이 삶을 망가뜨리는지 주목한다. 고관대작高官大爵, 화려한 관복을 몸에 걸치며 거대한 저택에 사는 데 그는 관심이 없었다. 아니, 도리어 그것을 더럽다고 폄하하기까지 한다.
공자가 중궁에 대해 말했다. “얼룩소의 새끼라도 털이 붉고 털이 곧구나. 쓰이지 않고자 한들 산천의 신들이 내버려 둘까?”
子謂仲弓曰:「犂牛之子騂且角,雖欲勿用,山川其舍諸?」 <논어> (5-6)공자의 제자 중궁은 출신에 문제가 있었던 듯하다. 그를 얼룩소의 새끼[犂牛之子]로 묘사한다. 털이 고르지 못하고 얼룩덜룩 지저분하는 것은 흠결이 있다는 뜻이다. 그의 부모가 죄를 저질러 그런 것은 아닐까? 그러나 중궁을 두고는 ‘털이 붉고[騂] 뿔이 곧다[角]고’ 말한다. 그러면서 산천의 신이 버려두지 않을 거란다. 비록 죄인의 자식이더라도 능력이 있으니 등용되어 쓰일 것이라는 뜻. 공자는 신성한 제의, 즉 국가의 사업에 참여해야 한다 주장한다. 그러나 장자의 생각은 다르다. 이 점에서 이 둘은 서로 정반대에 서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르냐를 따질 수는 없다. 다만 장자의 입장은 선명하다. 누군가는 노동을 신성한 의무라 이야기하겠지만, 노예의 삶과 다를 것이 없다 평하는 사람도 있을 테다. 돈을 번다고 말하는가 하면, 신체 혹은 시간을 판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장자는 후자의 관점에 서 있다. 장자는 도구화되는 삶을 경계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은 깔끔하고 화려한 태묘보다 ‘지저분한 진흙탕 속[污瀆之中]’이 어울린다 말한다. 이곳이야 말로 ‘제 자신을 위한 즐거움[自快]’을 ‘맘껏 누릴 수 있는[游戲]’ 공간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두 가지 더러움[污]이 있다는 점이다. 장자는 초위왕의 사신에게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無污我] 말한다. 장자는 관직을 멀리했을 뿐만 아니라 그 제안 자체를 더럽다고 말한다. 하여 장자에 실린 허유의 고사가 유명하다. 허유는 자신에게 천하를 양위讓位하고자 하는 요임금의 제안을 거절한다. 이 이야기는 <장자>에도 실려 있다. 그러나 이 우화는 점점 발전해 나중에는 귀를 씻는 내용까지 더해진다. 더러운 이야기를 들었으니 물로 씻어내야 한다. 세속의 유혹을 듣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오물을 뒤집어 쓰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깨끗함만을 추구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초위왕의 제안을 더럽다며 거절한 그는 더러운 ‘지저분한 진흙탕 속’에 거한다. 과연 더러움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무엇을 더럽혔는가? 만약 장자가 ‘맑고 깨끗한 물가에서 몸을 씻고 시원하게 바람을 즐기며 살겠소’라고 했다면 우화적 요소는 크게 반감되었을 테다. 더러운 세속과 청정한 은자의 삶이란 얼마나 단순한 구도인가. 두 더러움의 역설적 배치는 장자의 삶을 골똘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를 어떤 모습으로 그려야 할까?
이것은 사마천의 서술이다. 그는 <장자>의 우화를 빌려 절묘하게 장자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장자> 본문을 통해 만나는 장자는 또 어떤 모습일까? 대체로 잠자는 장자의 모습이 많이 그려졌다. 유명한 호접몽胡蝶夢의 고사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밖에 장자의 여러 모습을 상상할 필요가 있다. 그는 하나의 표상으로 쉬이 포착되지 않는 인물이다. <장자> 읽기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자> 읽기는 마치 롤러코스터 타는 것과 같고, 미꾸라지 잡는 것과 같다. 위아래로 정신없이 요동치며 아찔한 곳으로 우리를 이끈다. 한편 잡았다 싶으면 손에서 쓱 빠져나가 어지러운 흙탕물 속으로 몸을 감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