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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을 버려야 한다
    카테고리 없음 2022. 4. 29. 16:47

    동양의 여러 사상가 가운데 말의 한계를 이야기한 사람은 적지 않다. 말 – 언어는 늘 제한적인 기능만 할 뿐이다. 세계의 참모습은 이 말 – 언어의 굴레를 훌쩍 넘어선다. 아마도 여기에는 중국 문자와 언어의 특징도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문자는 단순히 기호가 아니라 세계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그림 가운데 하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욕망은 늘 실패할 뿐이다. 세계는 언어 바깥에 있다.

     

    참된 '도'는 무어라 부를 수가 없어. 참된 말다툼은 말로 하지 않지. 참된 사람다움은 사람다움 같지 않아. 참된 깨끗함은 겸손하지 않아. 참된 용기는 겁주지 않아. "도라고 말하면 도가 아니다. 말다툼을 해서 가리면 실패한다. 사람다움을 지키는 사람은 정작 그렇지 않다. 깨끗하다는 사람은 믿을 수 없다. 남을 겁주는 용맹은 쓸 데가 없다." 이 다섯 가지는 맞는 말인데, 부족한 구석이 있어. 그러니 알지 못하는 데 나아가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지극한 것이야.
    누가 말로 하지 않은 말다툼을 알까. 말할 수 없는 도를 알까. 만약 안다는 사람이 있다면 우주를 품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 아무리 부어도 차지 않고, 아무리 퍼내어도 마르지 않을 테지. 그렇게 끝이 없지만 어째서 그런지는 몰라. 이것을 보광葆光, 가리어진 지혜라고 하자.
    夫大道不稱,大辯不言,大仁不仁,大廉不嗛,大勇不忮。道昭而不道,言辯而不及,仁常而不成,廉清而不信,勇忮而不成。五者园而幾向方矣。故知止其所不知,至矣。孰知不言之辯,不道之道?若有能知,此之謂天府。注焉而不滿,酌焉而不竭,而不知其所由來,此之謂葆光。

     

    장자에게 커다랗다는 말은 세계의 본디 실상을 이야기하는 것 가운데 하나기도 하다. 참된 것은 크다. 크다는 것은 차마 말로 담아낼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 담겨있기도 하다. 따라서 이 커다람 자체, 말로 표현되지 못하는 그 바깥의 세계를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다면 그는 무한한 변화에 대응할만한 훌륭한 지혜를 얻는 것이리라. 마르지 않는 샘, 차지 않는 독과 같다. 이것이 바로 도道의 세계일 것이다. 이 참된 세계를 인지하는 인물은 세계를 구분하며, 구획하는 지식 이전의 본디 모습을 보는 사람이다. 그는 세계를 바라보는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

     

    옛날 사람은 말이야 깨우침이 지극한데 이르렀어. 어느 정도였냐고? '있음' 이전을 생각하였지. 지극히 훌륭했어. 더 말할 게 뭐 있을까. 그다음은 무엇인가 있다고 생각한 거야. 그래도 경계를 생각하지는 않았어. 그다음은 경계를 생각했지만 그래도 맞다 틀리다를 따지지는 않았지. 맞다 틀리다를 세세하게 따지니 '도'가 엉망이 되어 버린 거야. 도가 엉망이 되어 버려서 치우친 마음이 생겨났지.
    古之人,其知有所至矣。惡乎至?有以為未始有物者,至矣盡矣,不可以加矣。其次以為有物矣,而未始有封也。其次以為有封焉,而未始有是非也。是非之彰也,道之所以虧也。道之所以虧,愛之所以成。

     

    이런 면에서 그가 비판하는 인물이란 곧 이 세계의 본질을 바라보지 못하고 특정한 틀에 얽매여 희비의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이다. 세계의 총체적 모습을 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희노의 감정이 일어난다. 작은 일에, 어쩌면 별 것이 아닌 일에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 이를 장자는 조삼모사라 불렀다.

     

    쓸데없이 정신을 힘들게 하면서 한 가지 주장에 몰두하지. 헌데 이전과 별 차이 없다는 건 모르고 있어. 이를 '조삼모사'라 해. 무슨 말이냐고? 이야기를 들어봐. 원숭이 사육사가 도토리를 주며 말했어. '아침엔 세 개 저녁엔 네 개다.'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냈지. '그럼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마.' 이번에 원숭이들이 모두 환호했어. 도토리 개수나 이로움이나 달라진 것은 없는데 성내고 기뻐하는 마음이 생겼잖아. 그러니 말에 휘둘리지 말로 바로 여기, 내 자리에서 시작해야 해. 바로 여기, 이 자리에서 성인은 옳고 그름의 다툼을 조화시키고 우주적 평등함에 쉰단다. 이것이 양행兩行, 옳고 그름을 모두 포괄하는 자리야.
    勞神明為一,而不知其同也,謂之朝三。何謂朝三?曰狙公賦芧,曰:「朝三而莫四。」眾狙皆怒。曰:「然則朝四而莫三。」眾狙皆悅。名實未虧,而喜怒為用,亦因是也。是以聖人和之以是非,而休乎天鈞,是之謂兩行。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런데 마음은 이 세상의 변화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기 쉽다. 사물의 변화에 따라 마음이 변화하지 않는 법은 없을까? 어떻게 하면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누군가는 무게감으로, 중후함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것이다. 가볍지 않다면, 튼튼한 마음을 갖춘다면 세상 일에 덜 괴롭힘을 당할 것이라고. 강한 마음을 가지라!

     

    그러나 장자의 해결책은 이와 달라 보인다. 장자는 세상의 흔들림에 기우뚱하지 않는 강한 자아를 주장한 것일까? 아닐 것이다. 도리어 장자는 침묵하는 것, 어떤 능력으로 내면을 채우는 것이라기보다는 주체가 본디 능력 없었음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그의 침묵에서 무거운 입술을 떠올리지는 말자. 도리어 그는 말을 멍하게 잃어버린 것, 말할 수 없는 무엇을 말했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는 침묵을 강요하기보다는 도리어 침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언어의 문제에서도 이야기하지 말 것을 충고하기보다는 말할 수 없음을, 말로 담을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고 하겠다. 마찬가지로 그가 입을 열었을 때에 그 입에 담기는 말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의 말은 세계를 규정하고 평가하며 그려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세계를 매만지는 말에 가깝다. 장자는 나를 잃었다고 말한다. 세계의 참모습을 봄에 있어 나[我]라는 규정적 틀이 무너진다. 마찬가지로 말[言]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말을 버려야 한다면, 말을 하지 말라는 금언의 규율이 아니라 말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말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어쩌면 좋은가. '말을 버려야 한다'고 벌써 말해버린 것을.

     

    장자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말이 아닌 말, 언어가 아닌 언어, 내가 아닌 나로 말하면 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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