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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직'과 '아님'의 미학
    카테고리 없음 2022. 4. 29. 16:46

    이 문제는 단순히 음악에만 그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 다른 구멍, 사람의 입[口]을 통해 울려지는 말[言]을 생각하라. 말 – 언어활동은 늘 어떤 제한성을 포함하기 마련이다. 그것이라 부르는 것은 그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입을 열어 말을 했기 때문에 그 본질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라는 말과 그것이 아니라는 말 사이를 잘 보아야 한다. 무엇인가를 지칭할 때엔 늘 어떤 덜어냄이 생기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아닌 것 – 덜어낸 것이 너무 큰 나머지 그것이라 지칭한 것을 가지고 그것이 아닌 것을 사유하기에는 턱 없이 모자란다.

     

    가리킨 것을 가지고 가리킨 것이 가리키려던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보다는 가리키지 않는 것을 가지고 가리킨 것이 가리키려던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낫지. 어떤 말을 가지고 말이 그 말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다른 말을 가지고 말이 그 말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나아. 
    以指指之非指,不若以非指指之非指也;以馬馬之非馬,不若以非馬馬之非馬也。

     

    따라서 무엇이 아닌 것, 아직 지칭하지 못한 무엇, 규정되지 않은 무엇에 주목해야 한다. 인간의 지각 역시 마찬가지인데, 무엇이라 포착할 수 없는 그 바깥을 장자는 주목한다. 그와 반대로 무엇이라 규정하고 포착할 수 있는 감각의 총체란 – 이것을 성심成心이라 하자 – 장자에겐 극복해야 할 것이 된다. 이는 특정한 언어활동을 통해 표현되고 규정된다. 말이란 세계를 분할하는 활동이며, 이를 통해 특정한 가치들이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이 가치란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개별적 고유성을 파괴하는 폭력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이런 시비판단을 뛰어넘는 길은 없는가? 장자는 그것을 도道라 이름 붙였다.

     

    '도'는 어디에 감춰져 참 거짓이 있고, 참된 말은 어디에 감춰져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걸까? '도'는 어디로 사라졌기에 참된 말이 없고, 참된 말은 어디에 있기에 논쟁이 끊이지 않을까. '도'는 보잘것없는 통념에 가리어지고, 참된 말은 화려한 수사에 가리어지는 거야. 그렇게 유가와 묵가가 옳다 그르다를 따지고 있어. 한쪽에서 틀린 것이 다른 쪽에서는 옳고, 한쪽에서 옳은 것이 다른 쪽에서는 틀려. 다른 쪽에서 틀렸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우기고, 다른 쪽에서 틀렸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우기지. 이런 우격다짐 보다 참된 지혜가 낫지.
    道惡乎隱而有真偽?言惡乎隱而有是非?道惡乎往而不存?言惡乎存而不可?道隱於小成,言隱於榮華。故有儒、墨之是非,以是其所非,而非其所是。欲是其所非而非其所是,則莫若以明。

     

    말은 다툼을 낳는다. 서로가 옳고 그르다는 것을 두고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이는 사람들에게 도道가 가려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또 다른 지평, 밝은 지혜의 지평이 있다고 말한다. 대체 그것은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 것일까? <제물론> 안에서 이 밝은 지혜는 다양한 형태로 설명된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묘사는 회전의 중심이 되는 지도리로 묘사한 부분이다. 도는 마치 회전의 중심축과 같아서 다양한 모든 사물들에 대응하는 무한성을 갖는다. 도를 체득한다면 세상의 갖가지 일에 무수히 대응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저것이다'라고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이것이다'라고도 할 수 있어. '저것이다'라고 하면 알 수 없던 것도 '여기'에서 시작하면 알 수 있지. 그래서 이런 말이 있어. "'저것이다'는 '이것이다'에서 나오고, '이것이다'도 '저것이다'에서 시작한다." '저것이다'와 '이것이다'가 함께 생겨난다는 말이야. 그런데 함께 생겨나는 것은 함께 사라지고, 함께 사라지는 것은 함께 생겨나지. 옳다고 하면 옳지 않다는 것이 있고, 옳지 않다고 하면 옳다고 하는 것이 있어. '맞다'에서 시작하는 것은 '틀리다'에서 시작하는 것과 같고, '틀리다'에서 시작하는 것은 '맞다'에서 시작하는 것과 같아. 그래서 성인은 그렇게 하지 않아. 다만 하늘에 비춰볼 뿐이야. 
    바로 '여기'에서 시작하는 것이야. 그러면 '이것이다'가 '저것이다'가 되고, '저것이다'가 '이것이다'가 되지. 저쪽에도 옳고 그름이 있고, 이쪽에도 옳고 그름이 있어. 그럼 '저것이다'와 '이것이다'의 구분이 있는 걸까. '저것이다'와 '이것이다'의 구분이 없는 걸까? '저것이다'와 '이것이다'가 서로 대립하지 않는 것, 이것을 도추道樞, '도'의 회전축이라 할 수 있어. 회전축은 중심에 있어서 끝없이 변화에 대응할 수 있지. '맞다'도 끝이 없고 '틀리다'도 끝이 없어. 그러므로 '참된 지혜가 낫다'라고 말했던 거야.
    物無非彼,物無非是。自彼則不見,自知則知之。故曰:彼出於是,是亦因彼。彼是,方生之說也。雖然,方生方死,方死方生;方可方不可,方不可方可;因是因非,因非因是。是以聖人不由,而照之于天,亦因是也。是亦彼也,彼亦是也。彼亦一是非,此亦一是非。果且有彼是乎哉?果且無彼是乎哉?彼是莫得其偶,謂之道樞。樞始得其環中,以應無窮。是亦一無窮,非亦一無窮也。故曰「莫若以明」。

     

    장자에게는 두 세계가 존재하는 듯하다. 하나는 물物로 이야기되는 개별 사물들의 세계라면 또 다른 하나는 바로 도道로 이야기되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각기 다른 가치들이 대립하는 세계이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들면 무엇인가를 버릴 수밖에 없다. 옳음과 그름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는다. 이 둘 모두를 뛰어넘는 세계란 없는 것일까? 저것과 이것의 세계 말고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는 없을까? 장자가 제시하는 것은 도道의 세계이다. 바로 여기에 이 둘을 뛰어넘는 길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도道는 특정한 무엇이라고 규정지어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장자는 도道를 무엇이 아닌 것으로 설명한다. 그가 그렇게 설명을 아끼는 이유는 무엇이라 콕 집어 말할 경우 그에 반대되는 것이 자연히 생겨나기 때문이다. 무엇이라 부르는 순간, 무엇이 아닌 것이 등장한다. 따라서 무엇이 아니라는 그 부정의 무한한 가능성에 도道는 숨어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시작'이라는 것이 있어. 그러면 "'시작'이 아직 시작하지 않음"이 있겠지. 또 "'시작'이 아직 시작하지 않음"이 아직 시작하지 않음도 있겠지. '있음'이 있어. 그러면 '없음'이 있지. 또 "'없음'이 아직 생기기 이전"이 있을 거야. 그리고 "'없음'이 아직 생기기 이전"의 그 이전이 있겠지. 문득 '없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있음'과 '없음' 가운데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 아직 모르겠어. 지금 내가 말한 것이 있잖아. 그런데 내가 말한 것이 말한 게 있는지 말한 게 없는지 아직 모르겠어.
    有始也者,有未始有始也者,有未始有夫未始有始也者。有有也者,有無也者,有未始有無也者,有未始有夫未始有無也者。俄而有無矣,而未知有無之果孰有孰無也。今我則已有謂矣,而未知吾所謂之其果有謂乎,其果無謂乎?

     

    도道는 하나의 의문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도를 인식하는 길은 다른 것을 아는 것과 다르다. 참고로 장자는 '도를 안다[知道]'고 표현하기보다는 '도를 얻었다[得道]'고 표현했다. 도道란 개별적 경험의 장에서 체험되는 것이며 구체적으로 습득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보편적인 원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파편적인 조각으로 나뉜 개별적인 부스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규정할 수 없음이야 말로 도의 가장 큰 특징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큰 것은, 세계의 참모습을 담고 있는 것은 무엇이라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부정의 지식, 그 불가능에 주목해야 한다. 무지에서 지혜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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