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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카테고리 없음 2022. 4. 29. 16:44
    도란 만물(자연과 인간으로 이루어진 세계)을 존재∙변화시키는 근원적인 주재자인데, 그에 비해 인간은 이 도에 의해 존재∙변화되는 단순한 피주재자, 만물의 한 존재에 불과하며 그러므로 소외되고 몰주체적인 존재로 간주되었다. 이런 까닭에 도가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는 인간소외의 극복과 주체성의 획득이었는데, 그 기초에는 '도—만물'의 두 세계를 도려하는 독자적 존재론(두 세계론)이 깔려 있다. 그 목적은 단순히 만물의 하나에 불과한 인간이 도에 도달하고 도를 파악함으로써 도가 세계에 가지는 전능한 힘(일체의 만물을 존재∙변화시켜 주재하는 힘)을 손에 넣고 그것을 통해 소외를 극복하고 주체성을 획득하여 스스로 위대한 주재자로 세계 속에 우뚝 서는 데 있었다.
    – <중국 제국을 움직인 네 가지 힘>, 미조구찌 유조 외, 25쪽.

     

    인간의 한계는 자명하다. 인간 역시 천지간에 존재하는 만물[物]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개별 사물은 제각기 저마다의 한계에 갇힌 존재들이다. 인간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이 제한적 사물은 도道의 무한성과 비교할 때 그 한계가 자명하다. 인간의 지각, 언어활동도 마찬가지이다. <제물론>에서 우리는 다양한 방면에 걸친 장자의 불신을 볼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지각 자체를 불신한다. 개별적 판단이란 일시적으로만, 혹은 특수한 상황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닐까?

     

    털끝 보다 큰 것이 없고, 태산도 작다. 태어나자 죽은 아이보다 오래 산 사람이 없고, 팽조도 요절했다.
    天下莫大於秋豪之末,而大山為小;莫壽乎殤子,而彭祖為夭。

     

    크다 혹은 작다고 하는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장자는 이런 판단이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의미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양한 예를 들어 증거한다. 장자는 이렇게 묻는다. 사람은 습한 곳에서 자면 허리에 병이 생긴다. 그러나 미꾸라지에게도 그렇던가? 높은 나무는 어떤가? 사람에게는 아찔한 높이이지만 원숭이에게도 그렇던가? 대체 적합한 자리란 무엇을 말하는 건가? 사람은 고기를 먹는다. 사슴은 풀을 뜯고, 지네는 뱀을 먹는다. 올빼미는 쥐를 잡아먹는단다. 대체 이 넷 가운데 무엇이 참된 맛을 알고 있는 것인가? 사람들이 예쁘다고 칭찬하는 미인도 못가에 가면 물고기를 놀라게 한다. 사슴을 달아나게 하고 새를 쫓아 보낸다. 대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장자는 분명 맹자와 명시적으로 반대의 입장에 서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맹자는 사람들의 감각이란 비슷하여 누군가 그 감각의 척도가 될만한 인물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루의 밝은 시력이나 공수자의 뛰어난 손재주가 있어도 콤파스와 곡척을 사용하지 않으면 네모 모양과 원 모양을 만들 수 없다. 사광의 예민한 청력이 있어도 육률을 사용하지 않으면 오음을 바로 잡을 수 없다. 요순의 도가 있어도 어진 정치를 실행하지 않으면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릴 수 없다. … 성인은 밝은 시력을 남김없이 발휘하고 게다가 콤파스∙곡척∙수형기∙먹줄과 같은 정확한 도구에 의거했으므로, 네모난 것과 둥근 것 평평한 것 곧은 것을 만듦에 이루 다 쓸 수 없을 정도로 넉넉했다. 예민한 청력을 남김없이 활용하고 게다가 육률과 같은 정확한 기구에 의거했으므로, 오음을 바로 잡음에 그것이 이루 다 쓸 수가 없을 정도로 넉넉했다. 어진 마음과 생각을 남김없이 활용하고 게다가 차마 남에게 악하게 굴지 못하는 정치에 의거했으므로, 인仁이 천하의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졌다.”
    — <맹자>, 박경환 역, 홍익출판사. 187~188쪽.

     

    맹자는 사람들 가운데 남보다 더 잘 볼 수 있는 인간이 있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직선을 더 잘 본다. 물론 그에게도 부족한 부분은 있다. 곧은 자보다 정확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절대 음감을 가지고 음계를 구분한다. 그러나 육률, 다르게 말하면 음계보다 정확할 수는 없다. 맹자는 이 세계의 척도가 존재하며, 이 척도에 가까운 인간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척도는 이 세계의 시비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성인을 중시한다. 성인은 곧 척도를 체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 세상은 중심을 찾을 수 있다. 맹자는 이 성인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로잡으려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장자는 이와 정반대이다. 도리어 그는 그렇게 규정해 놓은 척도의 한계에 주목한다. 맹자가 음에 밝은 사광이라는 사람을 등장시켰다면 장자는 이와 비슷한 소문昭文을 예로 든다. 그는 매우 뛰어난 연주자였지만 그가 음악을 완성했던 것은 아니다. 아니, 완성이야 말로 또 다른 파괴를 의미한다고 장자는 말한다.

     

    나누는 것은 고정하는 것, 곧 통념을 따르는 거고, 통념을 따르는 것은 망가뜨리는 거야.
    其分也,成也;其成也,毀也。

     

    장자는 말한다. 개별적인 대상으로 나누는 것(分)은 그 대상을 구체화하여 확정하는 것(成)이기도 하지만 결국 그 본질을 훼손하는 것(毁)이기도 하다. 여기서 장자가 음악, 소리를 문제 삼았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소리-음악이란 유가에 있어 문명의 가장 완성된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시에서 마음을 일으키고, 예에 몸을 세우며, 음악에서 모든 것을 완성하라.[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공자가 주나라의 문물로 예악禮樂을 이야기했지만, 예식과 음악 가운데 그가 더 최종적인 가치를 부여한 것은 음악이었다. 조화로운 예가 완벽하게 구현된 상태.

     

    이러한 생각 가운데 유가가 음율, 오늘날로 따지면 음계 정도가 될 텐데, 이것을 규정하는 데 그토록 많은 에너지를 쏟았던 이유를 알 수 있다. 음은 단순히 어떤 떨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천지간의 우주적 기운이 응축되어 하나의 형태로 드러난 것이며, 그것은 곧 이 우주가 정교한 윤리에 의해 구성되고 운행되는 것을 보여주는 표징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정음正音, 바른 소리를 가지고 그것들을 조화롭게 하는 것[和]이야말로 천지간의 다양한 존재들이 어울리는 조화로운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장자의 소리란 다르다. 장자에게 소리란 제 각기 다른 구멍을 통해 울려되는 소리의 총합이다. 피리로 예를 들어보면 공자는 그 소리를 구분하고 그 소리들 사이의 조화를 이야기한다. 반면 장자는 어떻게 하면 그 소리를 조정할 것인가에는 별 관심이 없다. 도리어 그 소리라는 것조차 불어대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 따라서 그 불어댐이 사라지면 그 소리도 사라진다는데 주목한다. 그것은 음을 나누고 확정하는 것은 그 불어댐이라는 본질적 힘, 운동, 흐름을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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