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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텅 비어 있어
    카테고리 없음 2022. 4. 29. 16:43
    "갖가지 다른 것에 숨을 불어넣은 것인데도 제 스스로 그런 줄 알아. 저마다 각기 제 생각을 가지고 있다지만, 누가 불어넣은 것일까?"
    夫吹萬不同,而使其自己也,咸其自取,怒者其誰邪!

     

    바람은 하나이지만 제각기 구멍의 고유한 모양에 따라 서로 다른 소리를 낸다. 지뢰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뢰人 역시 마찬가지일 테다. 한 사람이 똑같은 숨으로 불더라도 운지법에 따라 다른 소리가 난다. 그래서 저마다 제각기 서로 다른 소리를 낸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런데 남곽자기는 묻는다. 불어대는 것은 누구인가? 이 질문은 또 다른 질문을 낳는다. 만약 불어대는 숨, 바람이 없다면 소리가 날 수 있을까? 구멍은 구멍 스스로 소리를 낼 수 없다. '라'라는 음계를 내는 구멍이 있다고 치자. 그 소리가 그 구멍의 것일까? 맞다. 그러나 소리를 내도록 만드는 숨, 바람이 그친다고 해보자. 그때에도 그 구멍은 '라'라는 음계의 구멍일까? 아니, 그때의 구멍은 그저 구멍일 뿐이다. 그때에도 '라의 구멍'을 '도의 구멍'과 구별할 수 있을까? 바람과 숨이 그쳐버린 그때에도?

     

    <장자>에서 구멍이란 단순히 사물에 뚫려있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에게도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 눈, 코, 입, 귀. 이 구멍으로 사람은 외부 사물과 만나고 접촉한다. 이 감각기관은 세계를 인식하는 통로인 동시에, 감각이 발현되는 통로이기도 하다. 말이 대표적이다. 인간은 이 구멍으로 느끼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 느낌과 표현이 개별 인간의 고유한 특징을 결정짓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나일 수 있는 것은 그런 개별적 감각의 총합이기에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이 구멍, 입을 통해 발화되는 개별적 특징은 나를 나라고 규정하는 하나의 틀이 된다. 이렇게  나라는 존재가 규정되지만, 그 고유성이란 매우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우리는 이 일곱 개의 구멍을 통해 개별적 차이가 발생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재로도 다양한 차이가 생기지만 정작 우리는 마치 피리와 같아서 그 바람이 멈춰버리면 그저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 되지 않는가? 오보에는 누군가 불어서 오보에의 소리를 낼 때 오보에일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남곽자기는 고목과도 같은 신체, 식은 재와도 같은 마음으로 멍하니 있었다. 대체 그는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그렇게 자신을 잃어버린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는 인간이 하나의 피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 개별적 소리들, – 이 소리의 총합을 장자는 심心이라 불렀을 것이다 – 이것의 고유함이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희로애락, 근심걱정, 요사하고 변덕스런 갖가지 마음이 생겨나. 텅 빈 곳에서 음악이 나오듯, 습지에서 버섯이 피어나듯 그렇게 매일 우리 앞에 여러 잡생각이 오가는데 어디서 튀어나오는 건지 알 수가 없어. 그 원인을 찾아보는 일은 그만두자 그만두어. 아침저녁으로 여러 마음이 오가는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일까? 그런 마음이 없으면 내가 없겠지. 내가 없으면 그런 감정이 일어나지도 않을 테고. 이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 모든 일이 일어나게끔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인간의 마음은 멈춰있지 않는다. 다양한 감정이 들끓어 넘친다. 여러 소리가 웅웅 울리는 아우성의 공간이다. 끊임없는 변화. 이는 외부의 세계가 끊임없이 우리에게 닥치기 때문이다. 변화무쌍한 세계의 바람은 우리의 마음에 갖가지 소리를 불어넣는다. 밤낮으로 여러 가지가 생겨나지만 대체 이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문제는 이 구멍들이 만들어내는 소리, 갖가지 감정이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좋으련만 그런 일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저마다 울리는 소리는 소음이 되어 내면을 진동시킨다. 인간의 내면은 늘 어떤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이 시끄러운 게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시끄러운 게 문제다.

     

    한번 이 몸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고 수명을 다하도록 하자. 다른 이들과 서로 부대끼고 치이며 살아가면 날랜 말이 달리듯 정신없이 시간이 흐르는데 도무지 멈출 수가 없어. 그렇게 수명을 다하면 애닯지 않겠어? 죽을 때까지 힘써 일하더라도 뭔가 이루어 냈다며 내세울 것이 없지. 고달프고 힘들지만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니 슬프지 않아? 죽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렇더라도 무슨 이로운 게 있을까. 몸이 늙어가면 마음도 똑같이 늙어가는 걸. 이게 가장 슬픈 일이지. 

     

    그것뿐인가. 인간의 삶이란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그렇게 세상의 일에 치이며 살다 보니 한 사람의 삶은 마치 말이 빨리 달려가버리는 것과 같다. 장자는 다른 부분에서 인간의 삶이란 좁은 틈으로 말이 달려지나가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인생이란 순식간이다. 이 빠른 속도를 늦출 수 있는 것은 없다.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우리는 자기 삶의 속도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죽음을 향해 달려 나간다. 사람의 수명이 각각 다르듯, 삶의 속도도 서로 다르다. 불행히도 우리는 그 속도를 모르며, 또 그 속도를 조절할 능력도 없다. 그것뿐인가? 가만히 있어도 언젠가 삶이 그치는 날이 있겠지만 세상은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종신토록 수고로운 것이 인간의 인생이다. 그렇다고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는가 하면 별로 그렇지도 않다. 피곤하고 힘든 것이 우리네 삶이다. 슬프지 않은가?

     

    장자는 인간의 보편적 삶의 한계를 잘 깨달았던 인물이다. 인간이란 불우한 존재다. 장자는 '죽지 않음[不死]'을 반기지 않는다. 몸뚱이가 낡으면 마음도 낡는다. 그것이야말로 커다란 슬픔이 아닌가? 삶이란 이렇게 허망하다. 이 허망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장자는 묻는다. 나 혼자만 이렇게 허망한 삶을 살고 있느냐고. 뭇사람의 삶이란 본디 이렇게 허망한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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