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방황과 소요
    카테고리 없음 2022. 4. 22. 16:05

    <소요유>는 장자와 혜시의 대화로 끝난다. 이 두 대화에서 커다란 나무가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왜 하필 나무였을까? 하나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장자가 칠원漆園의 관리였다는 점이다. 가까운 데서 나무를 보고 관찰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편 나무의 속성을 떠올릴 수 있다. ‘재목材木’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나무는 특정한 쓰임에 따라 잘리고 깎여 다듬어진다. 그것도 특정한 쓰임에 따라. 맹자는 인간의 본성[性]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고자告子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는데, 고자는 인간을 교육시키는 것이 마치 나무를 휘어 그릇으로 짜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마치 나무처럼 인간 역시 특정한 가치와 윤리에 따라 깎이고 다듬어지는 존재다.

     

    정말 크기는 하더만 아무 쓸모가 없어 부숴버렸다네.
    非不然大也,吾其無用而掊之。

     

    혜시는 장자의 말은, 장자의 사유는 크기는 하나 도무지 쓸모가 없다 말한다. 이 커다란 것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혜시는 이 커다란 박을 낳은 씨앗을 위왕에게 얻었다고 했다. 하나의 추측이지만 혹시 위왕의 소개로 장자와 혜시가 만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하튼 혜시는 쓸모없으니 부서 버릴 생각이란다. 그런데 장자는 화살을 도리어 혜시에게 돌린다. 문제는 크기가 아니다. 쓸 줄을 모른다는 점에 있다. 큰 것을 쓰기 위해서는 또 다른 기술이 필요하다.

     

    선생께서는 큰 것을 쓸 줄을 모르십니다. 송나라 사람이 있었지요. 그는 손을 트지 않게 하는 연고를 잘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대대로 솜을 빨아 생계를 꾸리는 사람이었습죠. 한 나그네가 그 소식을 듣고 찾아와 그 비법을 사고자 했답니다. 무려 백 금을 주겠다 했어요. 그러니 가족들이 함께 모여 의논할 수밖예요. 우리는 대대로 솜을 빨아 살았는데, 이처럼 큰돈을 만져본 일이 없다. 오늘 하루아침에 비법을 팔아 백 금을 얻을 수 있게 되었으니 팔아버리자. 
    나그네는 그 비법을 가지고 오나라 왕에게 유세했지요. 마침 월나라와 전쟁이 벌어졌는데 오나라 임금이 그를 장수로 삼았어요. 한 겨울 월나라 사람들과 수전을 벌이는데, 그 연고 덕분에 월나라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답니다. 결국 그 공으로 나그네는 봉지를 받았습니다. 손을 트지 않게 하는 건 똑같아요. 그런데 누구는 봉지를 받았고, 누구는 여전히 솜 빠는 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바로 다르게 썼기 때문입니다. 
    夫子固拙於用大矣。宋人有善不龜手之藥者,世世以洴澼絖為事。客聞之,請買其方百金。聚族而謀曰:『我世世為洴澼絖,不過數金;今一朝而鬻技百金,請與之。』客得之,以說吳王。越有難,吳王使之將。冬,與越人水戰,大敗越人,裂地而封之。能不龜手一也,或以封,或不免於洴澼絖,則所用之異也。

     

    흥미로운 우화다. 오나라와 월나라의 치열한 전쟁 가운데 엉뚱한 기술(?) 하나가 전쟁의 승패를 가른다. 병가兵家와 같은 전쟁 기계들은 전쟁에서 이길 다양한 전법과 계책을 만들어 내는데 몰두했다. 날카로운 칼과 창, 견고한 갑옷을 마련하고 전쟁을 준비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재주 하나가 상황을 비틀어 버렸다. 

     

    "선생께서는 꽉 막힌 생각에 갇혀 계십니다 그려.[則夫子猶有蓬之心也夫]" 장자가 혜시의 마음 상태를 꼬집는 말이다. 여기서 꽉 막힌 마음을 가리키는 ‘봉蓬’이란 글자는 앞서 메추라기의 비상을 이야기하며 나온 적이 있다. "저놈은 또 어딜 가는 거야? 숲속에서 이리저리 날아다니면 되었지 또 어딜 갈 필요가 있겠어?[彼且奚適也 翔蓬蒿之間 此亦飛之至也 而彼且奚適也]"

     

    터무니없이 크다며 박을 부숴버렸다는 혜시나 수풀 속에서 허덕이며 붕새를 비웃는 메추라기나 장자가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다. 이들의 마음에는 여백이 없다. 공백이 없다. 커다란 날개를 펼 공간이 없다.

     

    또 장자의 말은 기괴하게 생긴 나무처럼 아무 쓸모가 없단다. 울퉁불퉁한 데다 이리저리 꼬여 있어서 도무지 아무것도 만들 수 없다.  '재단해 쓸 수가 없다[不中繩墨]' 그래서 목수가 거들떠보지도 않는 버려진 나무다. ‘승묵繩墨’, 먹줄이란 규범적 가치를 비유한다. 나무를 자를 때 먹줄[繩墨]을 긋는 것처럼 선명한 가치 체계로 세계를 가르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 맞지 않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설명할 수 없는, 손에 자를 쥐고도 도무지 잴 수 없는, 측량할 수 없는 기괴한 이들을 만나는 일이 있다. 한 시대의 가치 척도로 잴 수 없는 존재. 장자는 아마 지나치게 크기 때문이라고 말하리라. 

     

    그렇다고 아무런 쓸모가 없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 커다란 존재에게 기대할 것은 다른 것이어야 한다. 하늘처럼 커다란 소에게 쥐 잡는 일을 시키는 것은 무리다. 재빠르고 약삭빠른 살쾡이같은 놈들은 쥐를 잘 잡는다. 쥐뿐인가. 그 날칼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작은 생물을 낚아채 잡아먹는다. 그러면서 제 세상인 양 이리저리 오가는 존재들. 그러나 이들은 화를 입을 수 있다. 마치 제 세상인양 으스데나 언젠가 덫에 걸리는 날이 오면 그 삶도 허망하게 끝나버린다. 세상일에 얽힌 사람에게 장자는 늘 비판적이다.

     

    큰 나무를 가지고 계신다 하셨지요. 그게 쓸모가 없어 걱정이라구요. 그것을 어느 것도 없는 가없이 막막한 들판에 심어둔다면 어떻겠습니까? 어슬렁거리며 그 곁을 돌아다녀도 좋고, 느긋하니 그 아래서 잠을 자도 좋습니다. 잘려 나갈 일도 없고, 해칠 사람도 없을 겁니다. 쓸모없다며 고민할 필요가 뭐 있을까요?"
    今子有大樹,患其無用,何不樹之於無何有之,廣莫之野,彷徨乎無其側,逍遙乎寢臥其下?不夭斤斧,物無害者,無所可用,安所困苦哉!」

     

    이제 그 유명한 ‘소요逍遙’를 이야기해야 한다. 이 커다란 나무를 저 멀리 어딘가에 심어두라. 그러나 장자는 대체 그곳이 어디인지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어느 것도 없는 가없이 막막한 들판[無何有之 廣莫之野]', 거기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구체적으로 있기는 한 것일까? 그곳은 마치 북명과 남명이 하나의 상상적인 공간이었던 것처럼 구체적 공간이라기보다는 상상을 통해, 가치의 전도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어떤 지점 아닐까?

     

    여기에 나무를 심어두자. 낯선 공간에 심긴 나무는 쓰임도 다르다. 나무 아래에서 쉬거나 그 주변을 정처 없이 오가기도 하자. 장자는 방황彷徨, 어슬렁거리며 그 곁을 돌아다니고 소요逍遙, 느긋하게 그 아래 누워 자겠단다. 많은 사람은 '소요逍遙’에만 집중한다. 그러나 바로 앞에 짝을 이루는 '방황彷徨’이라는 말이 있다. 

     

    오늘날 방황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과연 장자는 어떤 의미로 쓴 것일까? 목표 없이 이리저리 오가는 걸음이 아닐까. 참고로 김시천은 유遊를 ‘거리 둠’이라 풀이하기도 했다. 따라서 장자 본문을 따라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거리 두며 이리저리 오가는 걸음걸이 '방황유彷徨遊’와 느긋한 '잠자리逍遙寢'. 여기에는 도끼질도 고단한 일도 없단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