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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과 밖
    카테고리 없음 2022. 4. 22. 15:32
    그러므로 지혜가 관직 하나에 어울릴 만한 사람, 품행이 고을 하나를 다스릴 만한 사람, 군주 하나를 섬길 만한 덕을 갖춘 사람, 한 나라를 다스릴 만한 능력을 갖춘 사람 따위는 메추라기처럼 자신을 본단다.
    故夫知效一官,行比一,德合一君而徵一國者,其自視也亦若此矣。

     

    <소요유>에서 붕새의 이야기는 크게세 번반복된다. 곤이 변해 붕이 된 이야기. <제해>라는 책齊諧(혹은 사람)이 들려주는 기이한 이야기. 그리고 은나라의 탕왕이 들은 신비한 이야기. 탕임금의 이야기에서는 메추라기가 붕새를 비웃는다.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 탕왕에 주목하라. 탕왕은 은나라의 창시자이자 유가儒家의 성인으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메추라기의 좁은 식견에 대해 말한다. 관직 하나, 나라 하나에 적합한 덕을 가지고 있는 사람, 이들은 메추라기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본단다. 

     

    여기서 말하는 일관一官, 일향一, 일군一君, 일국一國이란 바로 통치의 세계를 의미한다. 관직에 올라 고을을 다스리고, 군주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를 메추라기와 같은 작은 새에 비유한다. 장자가 탕 임금의 이야기를 끌어들여 비꼬고 싶어하는 것은 이 세계, 천하天下를 다스린다는 자들의 좁은 식견이다. 그러고 보면 북명北冥이나 남명南冥이란 이런 통치와 무관한 세계가 아닌가. 

     

    천하天下라는 말에 유의하자. 천하를 옮기면 '하늘 아래'라는 뜻이지만, 이 말은 통치의 공간을 의미하는 말로 주로 사용되었다. 천자天子의 지배 아래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천하란 문화적 공간인 동시에 정치적 공간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장자는 그 세계 바깥을 말한다. 곤붕과 같은 이형의 존재는 천하에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바깥에서 날아와 또 다른 저편으로 사라지는 존재들이다. 그의 출발점도 그의 목적지도 이 세계 바깥에 있다. 따라서 장자의 말에는 불온함이 담겨 있다. 이 매끈한 세계, 하나의 언어, 하나의 윤리, 하나의 통치, 하나의 가치가 지배하는 세계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끝없는 세계에 노닌다면 어떨까. 그러면 또 무엇에 의지하겠어.
    遊無窮者,彼且惡乎待哉! 
    그러므로 이런 말이 있지. 지극한 사람에게는 자기가 상관없고, 신묘한 사람에게는 공적이 상관없고, 성인에게는 명성이 상관없다고.
    故曰:至人無己,神人無功,聖人無名。

     

    장자는 이 통치의 세계를 벗어나 끝없는[無窮] 세계 밖에서 '노님[遊]'을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이 '노님'을 현재 우리가 사는 삶과 무관한 낯선 세계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그는 탈주의 철학자이며 은둔의 철학자이기는 했으나 도피의 철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아마도 이 단단한 세계에 구멍을 뚫어대는 사람이었으리라. 장자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까마득한 산에 오를 필요는 없다. 도리어 다른 눈이 필요하다. 

     

    장자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삶은 통상적인 세계의 가치와 어울리지 않다. 그는 무기無己, 무공無功, 무명無名을 말한다. 흔히 '무기無己'를 사욕을 없앤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이는 너무나 섣부른 독해다. 장자는 보편적인 인간의 욕망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무공無功, 무명無名에서 말하는 것처럼, 공명功名이 추동하는 욕망을 문제 삼았다. 다르게 말해 자기가 없어야 한다[無己]는 말은 사회적 공적(功)과 사회적 명성(名)으로 구성된 자신을 떠나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장자가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성인聖人을 이야기한 것은 흥미롭다. 고대 중국인에게 성인이란 문화적, 정치적 영웅을 의미한다. 바로 공명功名의 화신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장자는 다르게 말한다. 성인에게는 공명이 없다. 그는 텅 비어 있는 존재여야 한다. 이어지는 요임금과 허유의 대화는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장자는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얼마나부질없는것인지를 이야기한다.

     

    "그대가 천하를 다스려 천하가 이미 평안한데 나더러 그대 자리를 대신하랴? 나 보고 명성을 추구하라는 말이군. 명성은 본질의 껍데기에 불과한데 껍데기가 되랴? 뱁새는 깊은 숲속에 둥지를 짓지만 가지 하나면 충분하고, 두더지는 황하의 물을 마시지만 배가 부르면 그만이야. 돌아가 그대의 일을 하시게. 천하를 다스린다느니 하는 일은 나에게 아무 쓸모가 없어."
    子治天下,天下已治也。而我猶代子,吾將名乎?名者,實之賓也,吾將賓乎?鷦鷯巢於深林,不過一枝;偃鼠河,不過滿腹。歸休乎君!予無所用天下

     

    장자는 천하와 무관한 삶을 말한다. 천하가 다스려지는 방식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는다. 도리어 그는 자신의 개별적 삶에 주목할 뿐이다. 나뭇가지 하나에 만족하고, 강에 목을 적시는. 이를 두고 한편으로는 소박하다 하겠지만, 구세救世를 꿈꾸는 유가나 묵가의 편에서 보자면 일신의 안녕에만 몰두하는 소인의 삶이라고 하겠다. 대체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양생주>나 <인간세>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미리 당겨 말하자면 장자가 보는 세계란 이미 소수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혼란으로 가득한 상황이었다.

     

    역사를 두고一治一亂이라 말하기도 한다. 혼란과 안정의 반복. 장자는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목전을 살았다. 누구는 가슴 뛰며 새로운 시대의 등장을 기대할 테지만 누구는 컴컴한 시대의 굴곡에 주목할 테다. 역설적이게도 해가 떠오르기 전이 가장 춥다며. 장자는 후자의 입장에서 시대의 그늘에 주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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