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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큰 것과 작은 것
    카테고리 없음 2022. 4. 22. 14:24
    그런데 매미와 메추리는 붕을 보고 비웃는단다. "우리는 바짝 힘을 내어 날아가면 나무에 부딪히는 게 고작이야. 그러다 나무에 닿지 못하고 땅에 처박히는 일도 있어. 그런데 뭣하러 구만리를 올라가 남쪽으로 날아가고 그런담."
    蜩與學鳩笑之曰:「我決起而飛,槍榆、枋,時則不至而控於地而已矣,奚以之九萬里而南為?」

    들로 소풍을 떠나는 사람은 세 끼를 먹고 돌아와도 여전히 배가 불러. 백 리 길을 떠나는 사람은 밤새워 곡식을 찧어야 해. 천 리 길을 가는 사람은 어떨까. 석 달간 양식을 모아야 하지. 저 매미나 메추리가 무엇을 알까. 작은 앎은 커다란 앎에 미치지 못하고, 작은 삶은 커다란 삶에 미치지 못하는 법이야. 
    適莽蒼者三湌而反,腹猶果然;適百里者宿舂糧;適千里者三月聚糧。之二蟲又何知!小知不及大知,小年不及大年。

    어떻게 그런 걸 아느냐고? 아침에 피는 버섯은 그믐달을 알지 못하고, 매미는 봄과 가을을 알 수 없어. 작은 삶이란 이런 거야. 초나라 남쪽에 명령㝠靈이라는 나무가 있는데, 오백 년을 봄으로 다시 오백 년을 가을로 산다고 해. 저 먼 옛날에는 대춘大椿이라는 나무가 있었데. 팔천 년을 봄으로 팔천 년을 가을로 살았다지.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팽조가 오래 살았다고 떠들어 대면서 그만큼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니 애닯지 않겠냐고.
    奚以知其然也?朝菌不知晦朔,蟪蛄不知春秋,此小年也。楚之南有冥靈者,以五百歲為春,五百歲為秋;上古有大椿者,以八千歲為春,八千歲為秋。而彭祖乃今以久特聞,眾人匹之,不亦悲乎!

     

    장자의 말은 터무니 없을 뿐만 아니라 쓸데도 없다고 손가락질받았다. 매미나 비둘기의 비웃음은 장자를 손가락질하는 편협한 시선을 비유한다. 이들의 말은 이렇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아가는 것도 쉽지 않은데, 가끔은 실패해서 땅에 곤두박질칠 때도 있는데 구만리는 뭔 소리며, 남쪽 저 끝으로 날아간다는 이야기는 대체 무슨 말이냐?

     

    장자의 비유에 주목하자. 교외로 잠깐 나가는 사람은 가벼운 도시락을 싸면 그만이다. 그러나 천리길을 떠나는 사람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지금이야 화폐를 들고 다니면 어디서나 끼니를 해결할수 있다. 그러나 고대사회에서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먼 길을 떠나기 위해서는 다른 준비가 필요하다. 

     

    <장자>는 멀리 떠나는 사람을 위한 책이다. 그래서 현재적 문제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장자>는 별 쓸모가 없다. 장자는 곤붕의 우화를 통해 그 여정의 목적지를 보여주었다. 아득히 먼 곳. 얄궂게도 장자는 따듯한 남쪽이나 해가 뜨는 동쪽으로 우리를 이끌지 않는다. '풀조차 제대로 자라지 않는 북쪽[窮髮之北]'. 따라서 장자가 제시하는 것은 모험이라 해도 좋을 테다. 거기엔 알 수 없는 기이한 존재들이 문득문득 우리에게 육박해 오는 곳이리라.

     

    철학적 모험이라 하자. 우리의 시선, 인식, 지각, 사유의 지평을 넘어 또 다른 세계로 떠나는. 철학자들 가운데는 발 밑을 헤아리는 자도 있다. 그들은 한발한발 조심스레 내딛는다. 손바닥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는 자도 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작은 실핏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장자는 그렇게 세심한 자도 아니고, 그렇게 치밀한 자도 아니다. 그는 성큼 내디디며 이렇게 말한다. '저 매미나 메추리가 무엇을 알까.[之二蟲又何知]'

     

    장자는 두 차이를 이야기한다. 큰 지혜[大知]와 작은 지혜[小知]의 차이.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한다.[小知不及大知]' 작은 세계에 갇혀서는 큰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세상이란 막막하고 커다란 진실로 육박해 온다는 점이 문제다. 저 유명한 <추수秋水>편의 고사를 인용해야겠다.

    가을의 홍수가 한꺼번에 넘쳐 숱한 강물이 황하로 흘러들었다. 물의 흐름이 [질펀하게] 멀리까지 퍼져서 양쪽 강가며 모래톱 둘레를 보아도 소와 말을 분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여기에 [황하의 신인] 하백河伯이 기뻐서 좋아하며 온 천하의 훌륭함이 모두 자기에게 [모여] 있다고 생각했다.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북해에 이르러 동쪽[의 해상]을 보니 [어찌나 넓은지] 물의 끝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하백은 비로소 그 얼굴을 돌려 [북해의 신인] 약若을 올려다보고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속담에 백쯤되는 도리를 들으면 저보다 나은 자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말이 있지만 이건 바로 나를 [두고] 말한 것이오. – 안동림역. 417쪽

    북해약이 말했다. "우물 속에 있는 개구리에게 바다에 대해 말해도 소용 없는 것은 [그 개구리]가 살고 있는 [좁은] 곳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오. 여름 벌레에게 얼음에 대해 말해도 별 수 없는 것은 [그 벌레가] 살고 있는 철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이오. 한 가지 재주뿐인 사람에게 도에 대해 말해도 통하지 않는 것은 [그가 받은] 교육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요. – 안동림역. 418쪽.

     

    장자는 이처럼 작은 지혜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을 보고 안타깝다고 말한다. 자기의 좁은 식견을 스스로 깨우치지 못하고 그 속에서 전전긍긍하는 사람을 보고 드는 자연스런 감정이리라. 흥미로운 점은 이 큰 지혜와 작은 지혜의 구분이 큰 삶과 작은 삶의 구분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작은 삶은 큰 삶에 미치지 못한다.[小年不及大年]' 


    여기서 큰 삶으로 옮긴 '대년大年’은 표면적으로 장수하는 존재를 가리킨다. 그러나 단순히 삶을 연장하는 것은 장자가 말하고자 하는 삶의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때로 죽음을 긍정하며 자연스레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뒤에 보겠지만 <대종사>에서는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따라서 장자의 ‘대년’이란 전설상의 신선처럼 죽음을 뛰어넘어 사는 삶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도리어 장자는 오래 살았다는 팽조와 같은 인물에 견주어 무작정 수명 연장을 꿈꾸는 사람들을 비웃는다. 그보다 큰 삶이 있다.

     

    대체 이 큰 삶은 무엇을 의미할까? 커다란 지혜가 낳는 커다란 삶이란? 이를 위해서는 장자를 비웃는 이들, 장자가 작다고 말한 이들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얽어매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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